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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만 알 수 없는 낭만

임창연 2006. 8. 18. 09:02

2006년 8월 18일 (금) 03:16   조선일보

 

[책 읽어주는 남자] 아름답지만 알 수 없는 낭만



[조선일보]

무엇이 낭만입니까? 스페인의 광택, 스코틀랜드의 안개, 이탈리아의 음향이 혼합된 것, 아니면 마법의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휘황한 빛깔의 유희, 마음을 흥분시키고 즐겁게 하는 착잡몽롱한 형상 같은 것들…. 그 풍광 속에 잠기면 왠지 그(녀)가 한없이 좋아질 것만 같은 무조건적 이유들…. 그러나 독일의 H. 하이네는 그런 것들이 진정한 낭만주의가 아니라면서, ‘명료한 윤곽’을 가져야 한다고 했답니다.

시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의 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예옥)을 권해드립니다. 박인환의 모든 시와 산문들을 모아놓은 전집을 권해드리는 이유는 막바지 무더위와 온갖 추문들의 짜증으로부터 벗어나는 한가지 방식으로 꽤 괜찮기 때문입니다. 잊혀진 낭만을 되살리는 것이 우리 삶에 활력을 준다는 것, 아시죠?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1950년대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박인환은 실제로 영화배우 못지 않게 준수한 외모를 가졌으며, 러시아풍 군용 코트와 버버리 코트를 걸쳐도 좋을 것 같은 세련된 멋을 추구했습니다. ‘명동백작’ ‘댄디보이’라는 별명을 가졌고요. 장 콕토와 마리 로랑생과 이상과 스티븐 스펜더를 흠모했습니다. 또 그에게는 일화가 많습니다. 특히 어느 선술집에서 휘갈겨 썼다는 시 ‘세월이 가면’은 같이 술잔을 나누던 극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테너 임만섭과 나애심이 불러 명동의 샹송으로 불렸다고 하네요.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그 박인환이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되어도 좋을 만큼 낭만과 역사와 세대를 넘긴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소설 ‘사랑의 역사’(민음사)도 함께 권해드립니다. 뉴욕 문단의 떠오르는 샛별로 불리고 있는 젊은 여성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작품입니다. 줄거리에는 지적 유희와 로맨스와 코미디와, 그리고 낭만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폴란드, 미국, 칠레 등지가 배경 무대인데요, 플롯은 미스터리 구조로 돼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레오 거스키, 알마 메레민스키, 알마 싱어, 세 사람입니다. 레오 거스키와 알마 메레민스키가 애인 사이입니다. 원래 문학적 재능이 있었던 레오는 알마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 소설을 혼자 간직하다가 고향 친구인 즈비에게 맡깁니다. 즈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칠레로 망명을 떠납니다. 물론 레오의 원고도 칠레 땅으로 넘어갑니다. 이 원고의 제목이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사이 레오는 헤어졌던 알마 메레민스키를 가까스로 찾아내지만 레오의 아이를 임신했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돼 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레오가 80세 노인이 됐습니다. 샬럿이라는 번역작가가 스페인어로 발간된 오래된 책 ‘사랑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샬럿의 딸인 10대 소녀 역시 이름이 알마 싱어였고, 알마 싱어는 소설 속의 알마 메레민스키가 실존 인물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녀를 찾아 나섭니다.

낭만의 본질은 미스터리입니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역사’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워너브라더스 제작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광일 [블로그 바로가기 k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