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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 열세 번째 시집 <꽃의 고요>

임창연 2006. 6. 10. 12:03
2006년 2월 24일 (금) 19:26   한겨레
‘풍장’ 부둥켜안은 세월 쓸쓸함에 기울었나


[한겨레] 황동규(68)씨의 열세 번째 시집 <꽃의 고요>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시방 같은 봄 저녁/황혼이 어둠에 막 몸 내주기 전 어느 일순/홀린 듯 물기 맺힌 눈 아니고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어떤 것이다.”(<슈베르트를 깨뜨리다> 부분)

1938년생인 황씨는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의 나이 어느새 고희를 코앞에 두게 되었고, 문단 경력도 어언 반세기를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인용된 시는 그만한 연륜과 경험을 거친 이에게서 나올 법한 통찰과 감회를 보여준다. 인간과 생의 바스러질 듯 아슬아슬한 존립 근거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맺힌 물기로써 상징되는 회한과 안타까운 미련….

시집 전체를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는 줄곧 시인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데, 그 일생일대의 화두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다소 분열적인 것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주의적 노력이 한편에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생의 막바지일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삶의 감각을 최대한 향유하려는 쾌락주의적 지향이 만져진다. 전자를 이성의 작동으로, 후자를 감성의 발현으로 각각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간 참 많이도 느슨해진 금,/마음먹으면 넌지시 들치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누군가 속삭인다,/비자가 필요 없다고./다른 누군가 속삭인다,/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또 누군가 속삭인다,/애초에 금 같은 것은 없었다고.”(<마지막 지평선> 부분)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밤/젖은 나무에 기대어 남자에게 따뜻한 젖 먹이고 있던 여자…/찬 술 마지막 방울까지 들이켰지,/앞으로 모쪼록 피 따끈히 도는 삶을 살라 빌며.”(<훼방동이!> 부분)

일관된 화두는 ‘삶과 죽음’

황씨의 시집에서는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손 털기 전>)이라는 허허로운 다짐과 “저린, 낯선, 눈부신…”(<사라지는 마을>) 혹은 “눈부시고 쓰리고 아리고…”(<막비>), 심지어는 “사로잡힘, 숨막힘, 캄캄함”(<그럼 어때!>)과 같은 날선 생의 감각에 대한 집착이 공존하고 있다. 평화롭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공존은 차라리 모순과 길항 속의 공존, 또는 변증법적 공존이라 부를 만한 성질의 것이리라. 삶과 죽음이 반드시 화해 불능의 대립 관계에 놓일 일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자 귀결이고, 삶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나중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라는 서양 속담을 참조한다면, 결국 사태는 죽음 쪽의 승리라는 말씀?

이 역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세에 ‘올인’하면서 현세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거나 멸시하는 종교적 경향이 없지 않겠지만, 시인이 생각하는 바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시집 도처에서 발견되는 생에 대한 적극적인 찬미의 노래들을 보라.

“십오 년 전인가 꿈이 채 어슬어슬해지기 전/바다에서 업혀온 돌/속에 숨어 산 두 사람의 긴 긴 껴안음,/얼마 전 거실에서 컴퓨터 책상으로 옮길 때 비로소 들킨/마주 댄 살들이 서로 엉겨 붙은/껴안음보다 더 화끈한 껴안음,/그만 절하고 싶었다.”(<절하고 싶었다> 부분)

죽음에 대한 수락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생의 감각에 대한 찬미가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을 <정선 화암에서>가 보여준다.

“네 삶의 모든 것, 고요 속의 바스락처럼/바스러지고 있다./자, 들리지?/허나 후회는 말라./부서짐은 앞서 무언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겠는가?//…/만든 것은 결국 안 만든 것으로 완성된다/꽃이 지며 자기 생을 완성하듯이.”(<정선 화암에서> 부분)

그럼 어때, 시여 터져라!

꽃이 지면서 자기 생을 완성하듯, 고요 속에 바스러지는 것이 곧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이다. 시집 전체의 주제라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시인의 이런 관점은 <풍장> 연작(1982~1995)에서부터 일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정서가 죽음의 쓸쓸함 쪽으로 좀 더 기울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3년 전 이맘때 앞선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를 낸 그를 서울대 교수회관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정년을 앞두고 연구실을 비울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명목은 거추장스러운 책더미를 어떻게 처분할까 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30년 가까이 깃들어 지냈던 공간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게 아닐까.

“오늘이 오늘 같지가 않습니다./진달래는 마음먹고 눈 주기 전에 사라지고/라일락 향도 열어논 연구실 밑을 그냥 스쳐가고/신록도 안구 몇 뼘 앞에서 맴돕니다./연못가에 영산홍이 가화(假花)처럼 낯설게 피어 있군요.”(<2003년 봄 편지 - 퇴직 전 마지막 봄, 김수명 선생에게> 부분)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 괴괴하다./비가 창을 한참 두드리다 만다./한참 귀 기울이다 만다. 고요하다./생시인가 사후인가,/태어나기 전의 열반인가?/앞으론 과거 같은 과거만 남으리라는 생각,/숨이 막힌다. 실핏줄이 캄캄해진다.”(<그럼 어때!> 부분)

앞의 시에서 가화를 보았던 시인은 뒤의 시에서 가사(假死)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는 막강한 죽음에 먹힌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시의 제목이 그를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럼 어때!/이게 바로 삶의 맛이 아니었던가?” 그로 하여금 끝끝내 시를 쓰게 만드는 힘이 바로 ‘그럼 어때’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 ‘그럼 어때’의 힘으로 그는 외치는 것이다: ‘시여 터져라!’

“시여 터져라./생살 계속 돋는 이 삶의 맛을 이제/제대로 담고 가기가 너무 벅차다./반쯤 따라가다 왜 여기 왔지, 잊어버린/뱃속까지 환하게 꽃핀 쥐똥나무 울타리,/서로 더듬다 한 식경 뒤 따로따로 허공을 더듬는/두 사람의 긴 긴 여름 저녁,/어두운 가을바람 속에 눈물 흔적처럼 오래 지워지지 않는/적막한 새소리,/별 생각 없이 집을 나설 때 기다렸다는 듯 날려와/귀싸대기 때리는 싸락눈을,/시여!”(<시여 터져라> 전문)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