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누고 싶은 글

이선관 시인의 13번째 시집 '나무들은 말한다'

임창연 2006. 6. 9. 12:00
새봄 한그루 나무로 되살아나는 민족시인
[CNBNEWS   2006-05-08 16:42:10] 

산번지를 몇 구비나 돌았을까
해 질 무렵에야 찾은 시인의 집
손바닥만한 쪽문을 열자
바다 내음 가득한 햇살이 일렁거렸네

반질거리는 햇살에 드러난
개다리소반과 귀가 해진 몇 권의 책
눈물이 배인 살림살이가
그토록 넉넉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군살이라곤 없이 마르고
허리가 굽은 다박솔 천년을 살듯
비록 낮고 축축한 곳에 살지만
마음의 키 한번도 굽히지 않은
거인의 땅을 보았네

새벽은 결코 악마의 얼굴을 감춘 돈이나
수명이 짧은 지위로 살 수 없다는 걸
시인의 여위었지만 따뜻한 손은
분명하게 말해 주었네

마산 앞바다를 품은 보석이
그득하게 쏟아진 산번지 쪽방에서......

-시인 박몽구의 '마산의 거인-이선관 시인 영전에' 모두


■ 장애 불구 세상과 타협 않고 살다간 ‘죽어도 죽지 않는 시인’

여기 죽어도 죽지 않는 시인이 있다. 비록 시인의 몸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시들은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뜬 채 지구촌 곳곳에서 살아 꿈틀대고 있다. 그의 시만 마산 어시장 바닥의 문어처럼 마구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힘겨웠던 삶도 여전히 부림시장 길목의 가난한 상인처럼 떠돌고 있다.

아마 시인은 이제 창동(경남 마산) 네거리 저만치 붕어빵을 팔고 있는 아지메 등 뒤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 줌 햇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제 저만치 바람과 비가 되어 그가 살아생전 다니던 창동 네거리(경남 마산)와 부림시장·어시장·간장빛으로 출렁이는 마산 앞바다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 이선관(1942~2005).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죽는 그날까지 마산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마산의 지키미. 한 살 때 백일해 약을 잘못 먹고 평생을 뇌성마비라는 천형 같은 장애를 지니고 살면서도 결코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다간 시인. 자신의 장애를 이 세상의 장애로 받아들이며 대쪽 같은 시를 삶의 무기로 삼았던 시인.

그는 행복하다. 비록 그의 몸은 갔지만 그의 시는 그가 살아 있을 때나 죽고 없는 지금까지나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난 4월 12일(금)에는 마산지역에서 그를 추모하는 모임(이선관 시인 1주기 추모모임)까지 만들어졌으니, 그는 앞서간 수많은 시인들에 비해 어찌 행복하지 않다 말 할 수 있으랴.

"제가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지은 시에 다 들어가 있는데 무슨 이야기가 또 필요하겠습니까/ 한번 읽어보십시오 건강이 허락되면/ 내년에 또 책으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인의 말' 모두

지난해 12월 14일, 지병인 간경화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린 시인 이선관의 유고시집 <나무들은 말한다>(바보새)가 나왔다. 이 시집은 이선관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시를 가려 뽑고, 탈고를 한 뒤 출판사에 보냈다가 교정까지 보았던, 시인의 13번째 시집이기도 하다.


■ 유고시집이라기 보다 사실상 직접 탈고한 시인의 13번째 시집
시인은 결국 자신의 13번째 시집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을 유고시집이라 이름 붙히기가 좀 민망스럽다. 유고시집이란 것은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시집으로 묶지 않은 시 원고를,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난 뒤 그 가족이나 지인, 선후배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었을 때 비로소 유고시집이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 곳곳에는 '죽음'이란 어두운 이미지가 담긴 시편들보다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드러내는, 한 줄기 따사로운 봄햇살 같은 시편들이 더 많다. "이천 년 초에는/ 툭 하면 병원을 들락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이라고/ 입방아를 찧고 찧고 또 찧고/ 야 이 놈들아/ 나 이선관은 불사조다"(나 이선관은 불사조다)란 시에서도 그의 생명에의 애착은 잘 드러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고구마도 비가 오지 않을 때면/ 하얀 꽃을 피운단다"(죽는 순간까지도 섹스를)라거나 "자기 딴에는 옳지 기회는 이 때다 싶었던지/ 목숨을 걸고 기어나가려고 발버둥칩니다"(나는 너를 죽일 권리가 없다), "당신이 먼저 죽으면/ 따라죽겠다는 사람이나/ 자기보다 내가 먼저 죽으면/ 화장시켜줘요 하는 사람이나"(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어 저승에 간다면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키도 작아지고
몸무게도 가벼워지는 걸까

그것은 아마
자연에 빨리 귀의하려는
귀소본능이 발휘되어
그렇게 되는 것일 게다

흙에서 나왔기에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모두

그렇다고 이선관 시인이 자신에게 한발짝 한발짝 다가오는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아고 있었다. 그는 지병인 간경화 때문에 일 년에 몇 번씩 들락거리는 병원에서 자신의 키가 작아지고 몸무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의 문턱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이 세상에서 만약 신이 죽는다면/ 시인이 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거라고/ 나는 약속하마/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나/ 뺨을 한 대 때려주겠다고"는 '뺨 한 대'란 시에서 시인의 이러한 의지는 더욱 단단해진다.


■ ‘마산 지키미’ 되겠다던 약속 끝끝내 지켜낸 ‘마산의 문화재’

하지만 시인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다'는 옛 속담처럼 저승보다는 지금 살고있는 이승에 더 애착이 간다.

"인간의 욕망 때문에 육감을 상실한/ 아, 퇴행하는 인간 진화의 후진이여"(동물들의 시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네요)라거나 "마산만으로 들어오는 바닷길을 있어도/ 나가는 바닷갈은 없다 하네"(나가는 길 없는 바다), "혼자 있을 때 씨를 뿌린다"(오늘도 나는) 등이 그러하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 자꾸 자꾸 만들어주는" 그 분은?

응급실에는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만
영안실에는 나가는 사람뿐이구나

숨통이 막힌 지구촌에서
아 아 막힘없이
정말 막힘없이
순환이 가장 잘 되는 곳은
병원뿐이구나

-'숨통' 모두

한때 자신의 불구를 마구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던 마산을 자신의 살과 피보다 더 사랑했고, 더 소중하게 아꼈던 '창동허새비' 이선관(1942~2005) 시인. 1942년에 마산 창동에서 태어나 꼭 한번도 마산을 떠나지 않고 마산의 지키미가 되겠다던 약속을 죽는 그날까지 끝끝내 지켜낸 '마산의 문화재' 이선관 시인.

1974년, 한일합섬에서 어린교를 지나 마산 앞바다로 흘러가던 여러 가지 빛깔을 띤 염색물을 보고 우리 나라 최초의 환경시 '독수대'를 쓴 시인.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로 끝나는 이 시를 쓰면서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산 앞바다가 환경오염으로 그렇게 죽어가듯이 장애를 가진 자신도 결국 그렇게 죽어갈 것이라고 여겼을까.
아무리 애터지게 환경시를 써서 이 땅의 바다와 대자연의 죽음을 알려도 '조국근대화'란 괴물이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한반도 구석구석을 마구 파헤쳤기 때문이었을까.

깡소주와 줄담배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던 이선관 시인은 결국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간경화란 병을 얻는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시인 이선관은 '야 이 놈들아/ 나 이선관은 불사조다'(나 이선관 1)란 시처럼 의사의 진단을 비웃으며 새롭게 되살아난다. 그때부터 시인은 환경 문제를 비롯한 남북통일, 문명비판, 생명의 문제에 더욱 깊숙히 파고 든다. 환경이 되살아나고, 남북이 통일되고, 나아가 지구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듯이.

부자를 부자로 자꾸 자꾸 만들어주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 자꾸 자꾸 만들어주는
전지전능하신 그 분이
설마 하느님은 아니겠지

-'설마 하느님은 아니겠지' 모두

시인 정호승은 <나무들은 말한다>의 표지글에서 "이선관 선생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우리 시대와 어떻게 화해하며 살았을까"라고 말한다. 이어 "그의 시 속에는 우리 시대에 대한 분노와 절망과 희망과 사랑의 발자국이 깊게 패여 있다"라며, "그의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저리고 아려와 잠시 먼 산을 묵묵이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혔다.

시인 홍일선(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은 "시인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다"라며, "선생의 노작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두고온 1980년대 옛 시간 어딘가의 첫사랑을 은밀히 만나는 것 같아 가슴이 설레인다, 이 시집이 소중한 것은 21세기 한국문학이 집단적으로 상실한 재야정신들을 호명하며 다시 불러내는 모성의 부드러운 힘"이라고 평했다.


- CNBNEWS 이종찬 기자      www.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