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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나이 들어도 시의 샘은 차고 넘친다 / 황동규 열 네 번째 시집

임창연 2009. 3. 9. 22:38

시인 황동규씨는 14번째 시집 『겨울밤 0시 5분』에서 “늙음을 받아들이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메시지를 시 속에 녹여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박종근 기자]

 

‘변화와 갱신(更新)’의 시인 황동규(71)씨가 열 네 번째 시집 『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을 펴냈다. 『꽃의 고요』 이후 3년 만이다. 이번 시집의 막바지 교열 작업이 한창이던 1월 하순, 황씨와 절친한 문단 후배들의 모임인 ‘사당동패’ 술자리에 낀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곧 시집이 나오는 데도 요즘 아침 저녁으로 새 시를 쓰고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체(停滯)를 거부하는 그런 부지런함 때문일 것이다. 50년을 넘긴 황씨의 시력(詩歷)은 청년다운 감성을 드러낸 1960년대, 사회비판적이던 70년대, ‘풍장(風葬)’ 연작시로 죽음과 대결한 80년대를 거치며 변모를 거듭해 왔다. 특히 75년 『삼남에 내리는 눈』 이후로는 3년 마다 새 시집을 내고 있다.

◆나이듦에 대하여=황동규씨는 등단 작품인 ‘즐거운 편지’에서 “내 그대를 생각함은/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며 사랑고백을 한 바 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에서는 눈먼 거지에게 1만원을 주고 나서 이를 생색내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때문에 황씨의 시집은 이전과의 차이, 변하는 추세에 주목하며 음미해야 한다. 이번 시집에서는 나이듦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진다.

 



시인은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중)이라고 고백한다. ‘캄캄한 그것’은 죽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인생의 황혼에서 한 발 더 나간 죽음 직전. 그 시간대는 색깔로 치면 잿빛이다. 인생의 이 시기에는 “잿빛 소리로 공기를 적시며 비”가 내린다(‘늦가을 저녁 비’ 중). 감기·대상포진 등으로 “한밤중에 깨어” “눈물 흠뻑 쏟”는 고생을 하는 것도 몸의 노쇠와 관련 있다(‘삶의 맛’ 중).

◆감각의 즐거움에 대하여=5일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실에서 만난 시인은 정작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풍장’ 등을 쓰며 웬만큼 극복했다는 것이다.

시인의 발길은 종종 깨끗이 비질하고 눈 더 내리지 않아 “무언가 더 쓸거나 지울 것이 없”는 마당으로 향한다(‘잘 쓸어논 마당’ 중). 그렇다고 시인이 원만구족한 세계에 안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홀연히 손등에 내려앉아 금세 녹아버리고 마는 한 톨 눈처럼, “무언가 짧게 흐르다” 마는 미세한 “색(色)의 본색”에 예민하게 반응한다(‘잘 쓸어논 마당’ 중).

남아 있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농도가 짙어가는/땀 냄새 침 냄새 눈물 냄새 속에서/시리고 황홀하고 저렸던 몸의 맛을” 여전히 얘기한다(‘몸의 맛’ 중). 황씨는 “결국 늙음을 받아들이되 감각의 즐거움을 잊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얘기”라고 말했다.

◆공감에 대하여=표제시 ‘겨울밤 0시 5분’ 역시 변화를 담고 있다. 자정 넘어 마을버스를 내린 시인은 가까운 집 놔두고 공연히 종점까지 걸어갔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라고 중얼걸리는 한 여자와 마주친다. 시인은 그 옆에서 멀쩡하게 “오기만 와봐라!”, 맞장구친다.

별 하나가 허망하지만 눈부신 혜성의 삶을 얘기하자, 시인은 답한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당장 삶이 절실한 사람에게 인생은 이런 거라며 따지고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타인에 대한 공감이다. 3년 후 그의 편지가 궁금해진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