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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의 시작(詩作) / 안도현

임창연 2008. 2. 1. 10:40

  고니의 시작(詩作)

                                안도현

 

고니떼가 강을 거슬러오르고 있다

그 꽁무니에 물결이 여럿 올올이

고니떼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 물결이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다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수면의 검은 화선지 위에

고니떼가 붓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있지만

웬일인지 썼다가 고요히 지워버리고

또 몇문장 썼다가는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저 문장은 구차한 형식도 뭣도 없으니

대저 만필(漫筆)이라 해야 할 듯,

애써 무릎 꿇고 먹을 갈지 않고

손가락 끝에 먹물 한점 묻히지 않는

평생을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얇은 서책 한 권 내지 않는 저 고니떼,

이 먼 남쪽 만경강 하구까지 날아와서

물 위에 뜻모를 글자를 적는 심사를

나는 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쓰고 또 쓰는 힘으로

고니떼가 과아니, 과아니, 하며

한꺼번에 붓대를 들고 날아오르고 있다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

나는 어찌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년 1월)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