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누고 싶은 글

청년정신과 현대시조 / 이상옥

임창연 2006. 10. 5. 09:07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 2006 세계시조사랑축제 시조문학세미나-시조문학의 청년화, 어떻게 할 것인가

일시: 2006년 10월 3일 오후 4시

장소: 창신대학 대강당

 

           <주제발표문>

 

          청년정신과 현대시조

                             -최남선과 이지엽을 중심으로

                                                                                                          이상옥

                                             



  1. 변환기


  시조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난 민족 고유의 시 장르로 확고한 위상을 지켜 왔다.

우리 문학사에서 신라의 향가나 고려가요 등의 유수의 시가가 현대문학에 편입되지 못하고 소멸되었지만, 시조는 현대문학사에서도 나름의 위상을 확보하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시절가조로서의 현실적 맥락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시조는 신라의 향가나 고려 가요와 질적으로 변별되는 새로운 갈래였다. 그 변별성은

  무엇보다 시조가 우리 시가문학에서는 최초로 현실 맥락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데 있다. 질서만의 이상적 관념세계인 초월을 추구하거나, 세계 질서의 빛이

  드러나지 않는 개인적 사태로 함몰되어 버리는 비속함을 열거하지 않고, 현실을 떠나지

  않으면서 현실에 질서의 빛을 비추고자 했던 것이다.


  신연우가 <<사대부 시조와 유학적 일상성>>(이회, 2000)의 ‘맺음말’에서 적시한 이 글은,  유독 시조가 ‘향가’나 ‘고려가요’ 같은 유수의 고전시가들이 사려져버린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면면히 생명력을 이어온 연유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9세기 말엽부터 이 땅에 서구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엄청난 패러다임의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문학인 시조가 오늘과 같은 현대시조로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조의 현실 맥락의 수용성을 주목하고 개화기의 시대정신을 시조에 투영한 육당을 비롯한 일군의 선각자들의 시조부흥운동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대시조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시조인 인구가 근자에 1000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1일에는 한국시조시인협회와 오늘의시조학회 등 시조단체와 시조시인 200여명이 한국일보사 13층 송현클럽에서 ‘시조의 날’ 제정 선포식을 개최했고, 지난 8월에는 만해마을에서 현대시조100년 세계민족시포럼, 현대시조 가곡작곡 발표회 등의 다채로운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맞아 현대시조는 다시 한번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제기해야 할 위기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영상 시대를 맞아 개화기의 서구화 물결 이상의 큰 변환, 즉 문자예술에서 영상예술로 패러다임의 대 변환은 문자예술인 시조에도 충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시조의 앞길도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컴퓨터', '인터넷', '디지털카메라'가 너무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정보화 시대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세대는 농경 사회를 경험하

  고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정보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이룩한 문화를    한 생에 다 맛보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 경이롭다.

    지금은 디지털 문화예술 시대라고 일컬을 만하다.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이 일상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하고 문화 예술도 이미 새로

  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글은 필자가 무크지 <<디카詩 마니아>> 창간사에서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을 한 것은 관념적인 인식 토대에서가 아닌 필자의 체험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느 지면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디카詩 보급을 위해서 고등학교 특강을 몇 차례 가진 적이 있는데, 김해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강연 형식으로 하고, 진주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강연 형식과 더불어 동영상 시청을 병행하고서, 느낀 점은 고등학생들에게 더 이상 문자나 음성 언어만으로는 그들의 시선을 끌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런 급변하는 디지털 문화환경 속에 놓인 현대시조도 재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맞은 것이다.  

  이에 개화기 서구물결의 격랑 속에서 오늘의 현대시조로 우뚝 서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육당 최남선의 청년정신과 근자에 시조부흥을 위해서 인상 깊은 노력을 경주하는 이지엽의 청년정신을 살펴보면서 21세기 시조의 진로를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2. 청년정신의 전제


  그러면 청년정신이란 무엇인지, 먼저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할 듯하다. 청년정신 하면 일반적으로 자연적인 나이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널리 애송되고 있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는 청년정신이 자연적인 연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라네.

장미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라네.


청춘은 겁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말하는 것이라네.

때로는 스무살 청년에게서가 아니라 예순살 노인에게서 청춘을 보듯이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어간다네.

세월의 흐름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나

정열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늘리고

고뇌, 공포, 실망은 우리를 좌절과 굴욕으로 몰아간다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에의 선망, 어린이 같은 미지에의 탐구심,

그리고 삶에의 즐거움이 있게 마련이네.

또한 너나 없이 우리 마음 속에는 영감의 수신탑이 있어

사람으로부터든, 신으로부터든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힘의 전파를 받는 한

당신은 청춘이라네.

그러나 영감은 끊어지고

마음 속에 싸늘한 냉소의 눈은 내리고,

비탄의 얼음이 덮어올 때

스물의 한창 나이에 늙어버리나

영감의 안테나를 더 높이 세우고 희망의 전파를 끊임없이 잡는한

여든의 노인도 청춘으로 죽을 수 있네.

       -사무엘 울만, <청춘>


  청년정신이라는 이름의 청춘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한다. 청년정신은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으로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조의 청년정신도 사무엘 울만이 노래하는 ‘청춘’의 개념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최남선, 이지엽 두 사람이 시조로 향하는 용기와 모험심도 시대를 초월한 청년정신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3. 육당의 청년정신과 조선정신


  현대시조가 서구문물의 파고를 넘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조가 민족정서를 담고 있는 우리 성정에 맞는 고유한 시형식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서 현대시조로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즉 국민문학파의 인위적인 시조부흥운동의 폐해를 지적한 조동일의 시각이 대표적이다. 조동일은 <<소설문학>>(1987년 4월호)에 발표한 <시조부흥운동과 시조 작품>에서, 시조는 그냥 두어도 저절로 이어지고 있는데, 문학의 노선을 둘러싼 논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1920년대 중반에 새삼스러게 시조부흥운동을 일으켰다면서, 시조부흥론 덕분에 시조가 제대로 알려지는 좋은 계기를 마련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좌파 진영으로부터 시조는 지난 시기 양반문학이며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사고방식이나 나타내는 것이라는 비판을 자초한 것으로 본다.

  이처럼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 않지만, 전통단절론이나 이식문화론 같은 담론을 염두에 두면 당시 서구편향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풍토 속에서 시조의 운명도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을 터이다. 과연 최남선을 비롯한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시조가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협실의 소슨 대는 츙졍공 혈젹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즁의 풀은 뜻은 

    지금의 위국츙심을 진각셰계 

        -大丘女史, <혈죽가(血竹歌)> 1수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혈죽가(血竹歌)>가 최초의 현대시조로 판단되는 근거는 시가가 아니라 문학으로서의 첫 작품이라는 점, 즉 처음부터 활자로 발표되어 읽히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혈죽가>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충정을 테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5년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의 방에서 혈죽이 솟아나 뭇 사람의 귀감이 되었으며 충정공의 절개가 정몽주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민영환이 약관이 갓 넘은 나이로 정3품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30살도 채 되지 않아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씨 족벌의 핵심적 소장 멤버라는 특혜가 작용했다는 점, 그리고 요직을 이용한 매관매직·부정부패의 주역이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민영환에 대한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최초의 현대시조로 일컬어지는 <혈죽가>가 담고 있는 테마가 현실적 맥락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육당의 청년정신으로서의 조선주의와 동일 문맥에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틋하게 사랑하는 님이 있다. 十二三歲 때가 사랑의 싹이 돋은 뒤로부터 나이 들면 들 

  수록 더욱이 戀戀하여 차마 잊지 못하는 님이 있다. 그 님이 잊지 아니하더라면 六堂은

  念佛三昧로 淨土를 欣求하여 畢竟不退에 이르고 말았을지도 모를 것이다.

    六堂의 님은 구경 누구인가? 나는 그를 짐작한다. 그 님의 이름은 ‘조선’인가 한다.


  이 글은 벽초 홍명희가 육당의 <<百八煩惱>>에 말미에 첨부한 글이다. 육당은 소년․청년기부터 그의 님은 ‘조국’이었다. 조국을 가슴속에 님으로 품은 육당이 시조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한다.

  육당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육당은 선교사가 경영하는 제중원(후일의 세브란스 병원) 옆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서구사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배인 개화사상으로 10대 초반부터 신문에 논설을 투고하기 시작하면서 문장가로서의 기틀을 잡았고, 1902년 열세살 되던 해에 일본인이 세운 일어학교 경성학당에 입학하였으며, 1904년 열다섯살 때 20대 청년들 틈에 끼여 국비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일본으로 건너가 11월 동경부립 제일중학교 특설반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최연소 학생으로서 나이든 동창생들과의 불화 및 일인들에 대한 감정적 반발로 인하여 한 달만에 퇴교하고 이듬해 귀국하였고, 1906년 4월, 열일곱살 때 다시 사비로 일본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는데, 학생 모의국회에서 민족적인 모욕을 당하자 유학생의 선두에 서서 학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투쟁을 벌여 결국 3개월만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짧은 유학생활이었지만 일본을 통한 서구사상을 더 깊게 체험하고 개화계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1907년 18세 때 귀국하여 신문관을 발족시키고 단행본을 내는 한편 1908년 11월 <<소년>>을 창간하였던 것이다.  

  서구문화의 충격 속에 일본의 침략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당시 개화기 지식 청년으로서의 육당은 민족의식의 자각 속에서 나름대로의 활로를 모색했던 것이다.



    텨……ㄹ썩, 텨……ㄹ썩, 텨ㄱ,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泰山)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텨……ㄹ썩, 텨……ㄹ썩, 텨ㄱ, 튜르릉, 콱.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육당이 1908년 창간한 <<소년>> 창간호에 발표한 신체시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시는 당시의 청년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일본 유학을 통해서 서구문화를 체험하고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는 개화기 청년정신의 표상인 것이다. 구시대의 잔재를 타파하고 신문명을 건설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이 시 1연부터 5연까지 바다의 웅대한 힘과 기개로 노래되고 있고, 6연에서는 소년에 대한 희망, 즉 청년정신이 당시 시대정신임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서 주조를 띠는  '바다' 이미저리는 창창한 청년정신의 비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개화기 청년정신을 대변하는 육당이 현대 최초의 창작시조집 <<百八煩惱>>을 출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육당의 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경이로운 활동 가운데서도 한국사․·민속․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 등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조선정신’을 제창하며 민족문학운동으로서의 시조부흥운동을 펼친 것은 시조가 조선정신의 표상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당은

≪百八煩惱≫의 출간 외에도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등의 시조부흥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세우는데 앞장서며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육당을 필두로 하여 이병기, 조운, 이은상 등이 일으킨 시조부흥운동은 민족주의 문학운동적 성격을 띠고서 서구물결 속에서 우리 것을 지켜낸다는 의미와 함께, 카프의 의 계급문학에 대응하는 대의명분으로써 왜. 시조이어야 하는가라는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분명한 답변을 제시한 것이다. 

  시조부흥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무엇보다 육당의 청년정신이 환치되어 나타난 조선정신이었음은 분명하다. 육당이 후일에는 친일의 길을 갔지만 그건 차차하고 청년기의 님이  ‘조선’이었고, 그 뜨거운 조국애가 시조에 투영되어 오늘의 현대시조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4. 이지엽의 청년정신과 앞으로의 과제


  필자는 이지엽이 1978년에 펴낸 <<아리사의 눈물>>이라는 첫시집 속의 흑백으로 된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이상하게 육당을 떠올리게 됐다. 하늘을 응시하는 듯한 21세의 청년 이지엽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 것은, 그의 청년정신이 육당처럼 시조로 향하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은 듯해서다.


    아라사는 나의 理想입니다.

    밤이면 그는 나의 더운 가슴에 不眠의 바람으로 왔으며 낮이면 絶對의 하늘로 부딥혀  

  왔습니다. 그는 나의 사람이며, 눈물이며 또 한 나의 영원한 폐시미즘입니다.


  이 글은 이지엽 첫시집 <<아리사의 눈물>>의 ‘남기는 말’ <不眠의 바람과 絶對의 하늘앞에> 첫 부분이다. 왜, 육당의 님이 시조를 투영하는 ‘조선’이라면 이지엽의 님인 ‘아리사’가 시조의 표상으로 읽혀지는 것인가.

  그것은 21세기를 전후하여 현대시조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이는데, 그 한가운데 이지엽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지엽은 1996년 계간 <<열린시조>>를 창간한 바 있다. 기존의 시조전문지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위기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시조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시조의 엘리트주의를 내세우며 동시에 시조의 대중화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다 2003년에 <<열린시조>>를 새롭게 탈바꿈한 <<열린시학>> 여름호(통권 27호)로 재창간하게 된다. 이는 우리 문단이 연줄에다가 자본의 논리까지 개입해 영향력만을 확대하려는 이전투구가 공공연히 난무하는 가운데 월간 시전문지나 계간지에서 시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시조전문지는 시조시인들이나 돌려보는 잡지로 전락하고, 또한 독자들이 인식하는 시조의 모습은 고답적인 문학장르로 여겨지면서 마이너 장르로 시조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래서 이지엽은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는, 시조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문학이 하향평준화하는 요즘 상황을 타개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열린시학>>의 문호를 자유시에도 대폭 열어 시조인들과 자유시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는 마당으로 만들면서 자유시와의 비교를 통해 자극받은 시조시인들이 한층 공들인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게 하고, 광범위한 자유시 독자층을 시조 독자로 끌어들이겠다는 포부로 <<열린시학>>을 재창간한 것이다.

  이지엽은 21세기 시작과 함께 우리나라의 근현대 시조시인 100인의 대표작을 모은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을 태학사에서 기획하여 책임편집을 맡고 이 같은 시도가 “점점 지리멸렬해가는 시조에 대해 새로운 문학적 전기를 마련하려는 일”이라면서 “시조의 저변 확산운동에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에 이지엽은 <<유심>> 2006년 가을호 권두언 <현대시조 발전을 위한 혁신적 방안>에서 현대시조 발전을 위한 혁신적인 방안을 단기적인 방안과 장기적인 방안으로 제시했다.

  단기적 방안으로 첫째 현대시조에 대한 불평등한 요소를 각 분야에서 하나씩 개선해나가한다는 것, 둘째 시조인 스스로가 좋은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하야 한다는 것, 셋째 등단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주어지는 시조단의 문학상 또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것, 넷째 등용문의 획기적인 개선과 시조 전문평론가의 육성이라는 것이다. 장기적인 방안으로는 첫째 시조를 자연스레 접하고 익힐 수 있는 문화풍토의 조성이라고 판단한다는 것, 둘째 시조의 기본형에 대한 정립도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셋째 시조의 세계화 작업도 아울러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넷째 이 모든 일이 중단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체단체에서는 적극적으로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지엽의 시조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청년정신의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런 열정적인 청년정신의 소유자인 이지엽에게 육당의 청년정신이 겹쳐지면서도 우려의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서구물결의 범람과 일제의 침탈이 점철됐던 육당 시대에는 시조가 조선정신의 표상이라는 기치만 내걸어도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글로벌 디지털영상시대를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의 물결이 범람하는 가운데 시조의 활로를 찾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글로벌 시대에 이지엽이 주창하는 시조의 당위성이 우선 유효한 듯해도, 육당이 시조가 조선정신의 표상이라는 대의명분으로 민족주의에 호소하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지엽의 담론이 여전히 문자예술로서의 20세기 시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1세기 글로벌 디지털영상 시대에 시조의 과제는 새 시대에 걸맞는 시조정신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에 왜, 시조여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은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신연우, <<사대부 시조와 유학자적 일상성>>, 이회, 2000.

 李泰極, <<時調의 理解와 實際>>, 도서출판 冬柏文化, 1990.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