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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여자 / 김혜순 //미당문학상 수상작

임창연 2006. 9. 25. 09:00

               모래 여자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김혜순시인 약력]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79년 '문학과지성'에 시로 등단
-시집<또 다른 별에서>(81년), <나의 우파니샤드>(94년) 등 다수
-김수영문학상(97년), 소월문학상(2000년), 현대시작품상(2000년)

중앙일보 (2006. 9.21<목> 23면)게재 / 2006 미당문학상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