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누고 싶은 글

거리의 기타리스트 外 4편 / 김이듬

임창연 2007. 12. 26. 18:06

                거리의 기타리스트
                                    -돌아오지 마라, 엄마



   길거리의 여자는 기타를 껴안고 있다 젖통을 밀어 넣을 기세다 어떻게든 기타를 울려 구걸해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더 조급해진다 기타의 성기는 소리이므로 딸을 걷어차기 시작한다
   착지가 서툰 빗줄기는 보도블록에 닿자마자 발목을 부러뜨렸다 비가 지하도를 기어간다 질질 끌려간다 난폭한 여자의 팔에 기타가 매달려 있다 걸을 수 없는 조건을 가졌다
   담배를 물려다 말고 여자가 소리를 만지작거린다  기타는 여자를 경멸하므로 여자를 허용한다 자라지도 않고 떨림도 없는 기타의 성기에는 매듭과 줄이 있다
스무 장의 신문지와 스물 한 개의 철근이 뒹구는 지하실이다 팔 백 해리의 슬픔과 팔백 해리의 공복과 백만 마일의 바퀴벌레도 늘어나는 것이 죄인 줄 안다
   기타리스트는 딸을 안고 있다 다시 보면 기타가 여자를 껴안고 있는 자세다 기타는 기타리스트의 목을 조르고 있다 죽을까 말까 망설이느라 성장을 못한 딸의 손목이다
잔느 이브릴의 어머니는 딸에게 매춘을 강요했으며 기타처럼 모성이란 다양한 것이다 여자는 얼떨결에 기타를 갖게 되었다 여자는 기타를 동반하여 계단을 굴러가고 난간을 넘어가 세상을 추락한다 놀랍게도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이다
기타는 기타케이스 안으로 기타리스트를 밀어 넣는다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을 것을          
                                -금요일의 갤러리를 지나  


어떤 작품도 걸지 않은 채 자신만만하게 서 있는,
난데없이 도끼로 이젤들을 부수는,
관객을 보며 머리카락을 다짜고짜 자르는,


각별한 친구들의 첫 그룹전은 1회로 끝났다
‘삶은 아름다워’
‘지리멸렬하지’ (반복)
‘그가 카페를 옮긴 진짜 이유는 뭘까?’
늘 가던 코스로 운전을 하면 안 되는데, 길을 못 찾겠다
기껏 만든 죽음의 행위전은 팸플릿부터 진부했다


‘뭐 새로운 것 좀 없을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닥쳐, 닥치라구’ (반복)
카페 문을 닫을 때쯤 멱살들 쥐고 소리소리 지르겠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육거리의 가로등들은 노란 팬티를 벗어
제 얼굴에다 걸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차선 바꿔 바로 가야하는데, 길은 받아주지 않는다
18분씩이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걸어놓고
라디오DJ 배철수는 뭐하며 놀까?


지겨운 반복재생 모드로 이 세상 돌아가게 해놓고
팬티를 내리고 다리를 털며
거대하신 손은 뭐 또다시 주물텅거리나
비슷하거나 아예 똑같을 것을





                          공사의뢰인


   이 벽은 부숴서는 안되는 벽이라니까, 난 빨리 벽 트기를 끝내고 내부공사를 시작할 거라고 우겼다 이사를 나가던가 죽던가 그래라, 난 발가벗고 일했고 페미니스트 교수는 페티코트를 입고 작업했다 그 혹은 그녀는 불투명한 유리창을 선호했다 나는 벽돌처럼 날아다녔고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교수는 페인트공을 때렸다 저런 건 도면에도 없었어 깡통에 넣어, 그 혹은 그녀의 방문은 눌러준 다음 세워서 돌려야하는 복잡한 구조였고 나는 단순하게 작업을 요구했다 이 미친 완제품을 어떻게 리모델링하라고 이러는 거니 널 분양 받는 게 아니었어, 나는 세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비합리적인 주거공간이 필요했다 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러이러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므로 그래가지고, 좀 알아들어라, 장황한 시공법을 이해했다면, 붕괴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다면, 꿰뚫지 않았다면, 이 지루한 야간공사는 그때 끝났을까





            지금은 自慰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1. 팔

너를 만지기 보다
나를 만지기에 좋다
팔을 뻗쳐 봐 손을 끌어당기는 곳이 있지
미끄럽게 일그러트려지는, 경련하며 물이 나는
장식하지 않겠다
자세를 바꿔서 나는
깊이 확장된다 나를 후비기 쉽게 손가락엔 어떤 반지도
끼우지 않는 거다
고립을 즐기라고 스스로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팔은 두께와 결과 길이까지 적당하다


2. 털

이상하기도 하지 털이 나무에, 나무에 털이 피었다 밑둥부터 시커멓게 촘촘한 터럭, 멧돼지가 벌써 건드렸구나
밑에서 돌다가 한참 버텨보다가 몸을 날렸을 것이다 굶주린 짐승, 높디높은 굴참나무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뭉텅뭉텅 털이 뽑혀나가는 줄도 몰랐을 한밤의 사투, 살갗이 뜯겨나간 산은 좀 울었을까
나는 도토리 한 알을 발견했다 가련한 짐승이 겨우 떨어뜨리고 채 찾아가지 못했나 멧돼지가 쫓겨가고 나서야 나무는 던져주었을까
도대체 길 잘 못 든 나는, 손톱을 세워 나무를 휘감는다 한 움큼의 털을 강박적으로 비벼댄다 메시지 온다
        





                           별 모양의 얼룩


   베란다다 이불을 털다 소녀가 떨어진다 무거운 수염들과 단단한 골격의 냄새가 묻은 이불을 털다 한 여자가 떨어져버린 저녁, 피가 번지는 잿빛 구름 속으로 타조 한 마리 날아가는 지방 뉴스가 방영되고 기차를 타고 가던 그들도 앞부분이 무거운 문장의 자막을 읽게 될 것이다


   순식간이다 얼룩이 큰일이다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추위는 시작된다 냄새나고 화끈거린다 두근두근 한다 몰래 홑청을 바꾸고 펴놓았다 개킨다 올리다가 다시 내린다 이불 속 깃털을 뽑는다 큰 타조의 날개는 사라지고 발간 민머리 누더기, 이상한 얼룩이 묻은 이불은 논리가 없다 귀찮아 걷어찼다가 다시 껴안는다 제대로 꿰매지지 않는 기억은 비벼댈수록 스며들고 씻을수록 번져간다 어느새 늙고 추악한 소녀를 돌돌 말고 있다


   천상에서 이불을 털고 있나 검은 구름을 뚫고 희뿌연 깃털들이 뽑혀나오는 저녁, 자살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이 집을 떠날 때 나는 거울을 보며 마구 머리칼을 자르고 있었다 첫눈 내리던 밤이었고 넓고 푹신푹신한 이불이 베란다 아래 펼쳐져 있었다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고 난 눈을 뜬다 의사만 조금 웃는다 태어나던 순간에도 이랬을 것이다



           김이듬 2001년 『포에지』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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