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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미래의 책 - 주원익

임창연 2007. 10. 10. 22:14

미래의 책 - 주원익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 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그 아득한 지평에서

당신은 처음 나를 건너왔다

읽혀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한 권의 책이 미래처럼 놓여 있다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고

당신은 나를 건너가는 동안

미래는 이미 흘러가버린 문장들

 

침묵은 침묵 속에서 지속된다

 

 

 

 

시계바퀴 세공사

 

 

 

 

  그는 아침이면 이 분주한 도시를 움직이는 커다란 시계탑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시계는 드넓은 광장의 복판에 솟아 있어 길을 가는 누구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공사는 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다란 초침에 매달려 하루 종일 걸레질을 한다 거인의 그림자처럼 광장을 건너가는 불순한 시간들, 세계는 한 뭉치의 망가진 시계인 것이자 그는 매시 정각마다 뻐꾸기처럼 중얼거리며 시계탑이 황혼 속에 늘어지는 오후를 맞는다 하늘로 열린 돔에서 계시처럼 떨어지는 한 줌의 금빛 가루들을 올려다보며 그는 이제 시계탑의 우람한 기둥을 감아도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시계의 중심추가 박혀있는 꼭대기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는 모난 톱니바퀴들을 세심히 관찰하면서 가끔 시계의 온전한 체계를 일탈한 몇 개의 나사들을 두들겨팬다 곧장 구리스를 치고 빠진 자리를 채우고 나니 세공사는 슬슬 머리가 무거워진다 초승달이 초저녁의 시각을 가리키면 탑 꼭대기에 걸터앉아 잠시 쉬던 세공사는 비로소 번쩍이는 금속 연장을 내려놓는다

 

 

 

 

비밀들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의 비밀을 놓아버리세요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숨길 수 없는 마음들의 고독

그대는 텅 빈 상자를 열어

나의 말들을 가두네요

침묵이 갇히네요

폭풍 한 점 그대의 정수리 위로 지나가고

불타는 하늘의 재들을 바라봅니다

잿더미 속에 빛나는 보석들

그대의 비밀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비밀은 그대를 가두지 않습니다

나는 상자를 열고 재를 모아

비밀에게

내 것이 아닌 비밀을 보여줍니다

비밀 아닌 것이 없는 마음들을

말없는 그대에게 놓아버립니다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불꽃의 화환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말합니다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