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누고 싶은 글

'한 호흡' 外 16편 / 문태준

임창연 2007. 10. 8. 01:15

"" 詩人 문태준

詩人 문태준

·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 노작문학상, 동서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 시집 : <수런거리는 뒤란>(2000), <맨발>(2004),

· <가재미>(2006)

· 엮음시집 : <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

 
 

 

한 호흡 (맨발 /창비 /2004)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맨발 (맨발 /창비 /2004)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어두워지는 순간 (맨발 /창비 /2004)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리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역전 이발 (맨발 /창비 /2004)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빛이 살고 있고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老母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 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 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水平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 앞에 내려 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水平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 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 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 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 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 내신다

 

가재미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가재미 2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가재미 3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뎅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 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호두나무와의 사랑 (수런거리는 뒤란 /창비 /2000)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개미 (수런거리는 뒤란 /창비 /2000)

 

처음에는 까만 개미가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

젖꼭지가 가을 끝물 서리 맞은 고욤처럼 말랐다

댓돌에 보리이삭을 치며 보리타작을 하며 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해 다 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까매져 돌아가던 여자

담장 너머로 나를 키워온 여자

잔뜩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이 아슬하다

 

굴을 지나면서 (수런거리는 뒤란 /창비 /2000)

 

늘 어려운 일이었다, 저문 길 소를 몰고 굴을 지난다는 것은. 빨갛게 눈에 불을 켜는 짐승도 막상 어둠 앞에서는 주춤거린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 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 어둠 어둠 아니다.

 

벌레詩社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 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亭子모임처럼 그럴 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 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맨발 /창비 /2004)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 갈 수 없듯이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맨발 /창비 /2004)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 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들 듯 번져 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산수유나무의 농사 (맨발 /창비 /2004)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짧은 낮잠 (맨발 /창비 /2004)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