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잘 쓰는 법

글을 '쓸' 것인가, '칠' 것인가

임창연 2006. 7. 7. 07:32
글을 ‘쓸’ 것인가, ‘칠’ 것인가 - 육필의 힘은 언제나 나를 압도한다
안도현

서울 남산 아래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 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매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매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상에 다름 아니었다. 평소에는 선생은 매우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고 있었는데 작업에 들어가면 저리 꼼꼼한 ‘좀팽이’의 글쓰기를 하시는구나 싶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라고 한편으로 그 작은 글자 하나마다 혼을 불어넣으며 글쓰기에 임했을 시간을 생각하니, 그 육필 원고 앞에서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먼저 배운 ‘문학’은 선배들의 글씨체를 흉내 내는 일이었다. 선배들처럼 글씨를 써야 적어도 선배들과 같은 수준의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는 그때부터 만년필로 아주 예쁘고 멋진 글씨를 썼다. 함부로 흘려 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모범생의 필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문학청년의 냄새가 나는 그런 글씨였다. 그 필체를 연습한 덕분에 나는 그 선배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고, 때로 선배의 소설을 원고지에 옮겨 쓰는 대필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 선배의 필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를 거쳐 몇 해 동안 내 후배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글씨를 통해 원고정서법 뿐만 아니라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습작 시절에는 글씨 못지않게 어떤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중에 하나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는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는 첫 번째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기관이나 단체, 출판사나 신문사 이름이 찍힌 원고지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히 우쭐댈 수 있었다. 문인들이 스스로 디자인한 개인용 원고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도 한번은 그것을 흉내낸 적도 있다. 그때 거금을 들여 미색 모조지에 찍은 녹색 줄의 400자 원고지는 옛날 습작 노트 속에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원고를 이메일을 통해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가히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하다. 마감 시간 직전에 몇 번의 클릭으로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갈 필요도 없고, 우표에 침을 바를 일도 없어져버렸다. 놀랄 만큼 편리해졌으나 때로는 이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직 석 줄밖에 안 되는 나의 시「너에게 묻는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연탄재」로  바뀌는가하면 수많은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 글을 ‘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글을 함부로 ‘쳐’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