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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모습 / 정목일

임창연 2007. 10. 3. 12:02
                수필의 모습 / 鄭木日

 

수필은 고해성사와도 같다.
촛불 앞에서 자신이 지닌 모습을 그대로 진실의 거울 앞에 비춰보이는 일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선 맑게 닦여진 마음의 거울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촛불 앞에서 행하는 고해성사, 그 자체는 아니다.
모든 것을 진실의 거울앞에 다 드러내 놓았을 때,
마음 속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다 흘리고 난 뒤의 독백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온갖 감정의 앙금과 갈등의 응어리를 눈물로서 씻어내고 자신의 영혼이
맑은 거울을 갖게 되었을 때, 수필의 모습은 비로소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참모습이며 영혼이다."
무심결에 탄식처럼 토해내는 이 독백이 수필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백이 다 수필이 될 순 없다. 사람마다 지닌 마음의 거울은 제각기 다르다.
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는 일이란, 곧 인격의 수련과 마음의 연마를 말한다.
아무리 철학과 사상이 심오하고 학식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수필가가 되기 위해선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다.
마음의 거울에 삶을 어떻게 비춰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다.
즉, 철학과 사상, 학식이 수필의 요건이 될지언정, 수필 그 자체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요건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인생에 어떤 해석과
의미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유의 것으로서,
독자들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독백이되 그냥 자신의 푸념이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감과 새로운 발견과 의미를 제공해야만 수필이 될 수 있다.

수필은 맑은 가을, 산야에 피어나는 들국화와 같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수수하고 소박하다.
자신을 과장해서 보이려거나 뽐내려 들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걸음 물러선 마음의 여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겸허, 꾸밈없는 소박함 속에 수필의 향훈이 있다.
들국화는 화려한 모습은 아니나, 그냥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샘물에 막 얼굴을 씻고난 모습처럼 그 표정엔 맑은 고요가 가라앉아 있다.
단번에 눈길을 끄는 꽃은 아니나,
볼수록 아리잠직하고 샘물을 길어 올리는 듯한 신비감이 깃들어 있다.
이 평온하고 정한(靜閑)한 발견과 경지가 수필의 참모습이 아닐까 한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의 정서적 율격, 소설의 사실적 재미를 함께 지니면서 시로는 토로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
소설로선 수용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수채화일 것이다.
시가 여백을 남긴 동양화라면, 소설은 사실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서양화에 비유될 수 있다.
수필은 시처럼 지나친 압축과 상징, 또한 비유를 수용하지 않고 소설처럼 장황하거나
독자들에게 흥미와 충격을 주어 현혹시키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시와 소설의 거리 중간쯤에서 시와 소설이 지닌 장점을 취하면서 특유의 빛깔을 만들어낸다.
수필은 전형적인 현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스런 격조를 지님으로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부담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 문득 깨달음을 주는 삶의 이야기,
평범한 생활인의 철학,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해학을 제공한다.
수필의 친화력, 자연스러움은 누구나 쉽게 독자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글을 쓰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이것이 수필이 갖는 장점이요, 특질의 하나다.

누구든지 써보라고 마음을 끌지만, 좋은 글을 빚어내기란 쉽지 않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항상 마음의 거울을 청결히 닦아두어야 하고,
그 거울에 인생의 멋과 정감이 비춰져야 한다.
마음의 바탕에 심오한 사상, 고매한 인품, 삶의 철학과 명상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 향기가 배여나야 한다.

수필은 마음의 대화이다.
사람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려 하고 남기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은
그가 엮어낸 인생 얘기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억되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비록 역사에 남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 지순한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연인들,
평생동안 우정을 나눈 친구들, 가난했지만 고고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삶과 얘기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가 상대방의 가슴속에 감동의 등불이 되어 켜져 있을 순 없을까.
두고두고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향기로 남을 순 없을까.
수필은 긴 얘기가 아니다. 평범하고도 소박한 이야기이나,
그 속에 비범의 세계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수필은 연꽃처럼 피어난다.
남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어느날, 환한 연꽃첨럼 피어난다.
흙이 썩어야 연꽃을 피울 수 있듯이 냉대와 소외의 기다림 속에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다.
수필은 원대한 포부나 찬란한 꿈을 지니지 않는다.
욕심으로부터 초탈한 마음의 경지, 소박한 생각이 피어올린 꽃일 따름이다.
자신의 가숨속까지 다 썩힌 바탕에서 뜻밖에 연꽃이 피어난다.
연꽃을 피우려고 진흙구덩이 속에 자신을 묻고 기다릴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의 세계는 다양하다.
굳이 장미나 난(蘭)만이 꽃이 아니듯, 꽃마다 일생을 통해 피어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삶과 개성으로 피어낸 수필을 가꿔야 한다.
개성과 함께 자신이 추구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다든지, 전문성을 지니는 일도 중요한다.
한국인은 논리성보다 정서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지만, 얖으로는 논리적인 글,
철학적인 글, 명상적인 글도 많이 나와야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서 얼마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며,
감동의 물결을 일으켜 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수필을 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을 쓰는 자세일 것이다.
시와 소설과 희곡과는 달리, 수필은 바로 자신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신변잡사(身邊雜事)의 나열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실의 발견,
본질의 탐구, 의미의 창출이 있어야 한다.
수필이야말로, 어떤 글보다 진지하고 심오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