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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적인 수필이 되어야 한다 / 정목일

임창연 2007. 10. 3. 11:54
              풀꽃이 되어 / 鄭木日

나의 수필은 가야 토기였으면 한다.
청자나 백자처럼 우아하고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자기(磁器)가 될 수 없다.
고려청자에는 우리나라의 해맑은 가을 하늘이 얹혀 있다.
조선 백자에는 봉창 문을 물들이는 달빛의 맛, 순백의 선미(禪味)가 깃들어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토기였으면 한다.
토기는 청자나 백자와 같이 흙으로 빚었지만 매끄럽지 않고 눈을 끌지도 않는다.
청자가 장미라면 백자는 난이요, 토기는 이름도 없는 풀꽃일 것이다.
나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냥 손으로 빚어 만든 토기 항아리에 더 정감을 느낀다.
문명의 얼굴을 쓰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는 토기는
천 년 전의 손길과 진솔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 준다.
토기 항아리엔 수천 년 전의 풀내음과 인간들의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다.
빗살무늬 하나에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 짐승들의 뒤를 쫓던 숨소리,
들판에서 듣던 풀벌레 소리가 잠겨 있다.
자기는 흙을 빚어 천삼백 도 정도의 온도로 구워 낸다.
흙이 불 속에서 하나의 자기로 될 때까지 도공들은 자신의 영혼과 솜씨를 불에 태운다.
흙이 화염 속에서 자기가 될 때까지 도공들은 신열 속에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나 빛깔은 재주나 지혜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과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보태어졌을 때라야만 명품(名品)을 얻을 수 있다.
청자이되 고려인의 마음이 맑게 비치는 신비스런 하늘빛은
아무리 마음을 맑게 닦아 낸 도공일지라도 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빛을 보듯, 한 그릇의 정화수를 대하듯 부드럽고 고요한 백자의 빛깔을
불 속에서 완성하는 일은 자신의 재주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흙과 불과 도공의 영혼이 어떤 영감을 얻어 일체감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에
무릎을 치는 명품 한 점을 얻을 수가 있다.

나의 수필은 그냥 덤덤하고 수수한 수필이길 바란다.
아예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지도,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열성과 인내도 없을 뿐더러 솜씨마저 시원하지 못하다.
그냥 소박하게 흙으로 마음대로 주물러서 빚고 싶다.
장식도 없이 세상에 남겨 놓아야 할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빚고 싶다.
하지만 흙은 좀 가려 쓰고 싶다.
내가 나서 자라던 고향 언덕의 흙, 동무들과 어울려서 뒹굴던 들판의 흙,
그리고 내가 묻힐 땅의 그 흙으로 빚고 싶다.
그래야 만이 나의 토기에는 나의 고향과 생각과 생명이 담겨질 것만 같다.
결국 내가 태어나서 돌아가야 할 곳은 흙의 품인 것을 알기 때문에...
토기 항아리에 담긴 물, 풀꽃이 내 생각이며 나의 세계이다.
나의 수필은 난(蘭)이 아니다.
청초하고 우아한 기품이 깃든 난이 될 수는 없다.
그냥 풀꽃이나 민들레 같은 소박한 꽃이면 한다.
나의 수필은 고귀한 학(鶴)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학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늘 높이 구름 속에서 보리밭으로 떨어지면서 자유자재로 노래부르는 종달새가 될 수 없을까.
고상하고 품위 있다거나 깨끗하다는 고정관념 속에 빠져 버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자유, 어떤 형식,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수필의 매력이다.
꼭 학일 필요가 없고 학이라야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판의 허수아비에 놀라 달아나는 참새나 미루나무 꼭대기에 보금자리를 지은 까치가 돼도 좋으리라.
나의 수필, 내가 쓰고자 하는 수필은 완숙한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가다듬는 일은 일생을 수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문장은 곧 좋은 인품과 사상과 인생관을 포용한다.
완숙한 문장이기보다는 서툴러 보이나 개성적인 문장을 쓰고 싶다.
문장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물을 보는 눈과 느낌이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물에서 나만의 발견,
어떤 내 나름대로의 생각한 조각을 어떻게 찾아낼 수 없을까.
나의 발견법, 명상법, 그리고 조촐한 미학을 어떻게 진실되게 형상화 시켜 놓을 수 있을까….
나는 표현보다도 먼저 발견과 명상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결국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서 생명의 신비,
우주의 생명률(生命律)을 찾아보려는 것이 내가 수필을 쓰는 데 항상 갖는 고민이며 관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늘 영감적인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달빛을 머금은 풀꽃과 같아질 수 있으며,
고기장수 아주머니의 심정과 같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같아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다만 마음을 맑게 닦아 두어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두는 것이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길임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수필은 고상하지 않으나 속되지 않고,
다정한 벗님의 편지를 받아 읽을 때처럼 그리움을 전해 주길 원한다.
국화꽃 곁에서 읽는 벗님의 편지글에서처럼 잊었던 추억의 등불이
켜지고 다시금 순수한 정의 샘이 솟아났으면....

나는 되도록 형용사와 부사, 비유법을 쓰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형용사와 부사는 얼마나 차이가 많으며 과장되기 쉬운가.
주어와 술어로써 든든한 뿌리를 박고 과장법과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의 실체를 진실 되게 나타낼 수 없을까.....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형용사나 과장법은 무성한 잎새이거나
화려한 단풍잎일 뿐 겨울이면 떨어져 버릴 것이다.
미문(美文)이란 사치스런 옷에 불과하다.

나의 수필, 나의 삶이여.
그것은 무명의 한 작은 별이며, 풀숲에 피어 아직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않는 풀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