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나누고 싶은 글

나무향기 / 정목일 (명수필 시리즈 12)

임창연 2006. 9. 19. 06:52

 나무향기

 鄭 木 日

 

 이 세상에서 나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나는 나무로 만든 그어떤 물건까지도 좋아한다. 나무 집이 좋고 목공예, 나무 침대, 목침 하물며 젓가락까지도 나무로 된것이 좋다.                                                                

 

 나무에게선 향기가 난다. 조그만 상자나 보잘것없는 목기(木器) 하나에도 생명의 향기가 배어 있다. 석재나 철재가 주는 차가움과 딱딱함이 아닌 생명체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체온,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목재에서 느낄 수 있는 친근감과 포근함은 생명체끼리 느낄 수 있는 교감신경이 아닌가 한다.

 

 목재를 손으로 만져 보면 석재나 철재 혹은 플라스틱 등의 무생명체에서 느끼는 싸늘함과는 달리 온기마저도 느껴질 듯한 촉감을 감지할 수 있다.

 나무에선 돌이나 쇠붙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률과 정서를 느낀다. 나는 이 세상 향기 중에서 나무향기를 제일 좋아한다. 나무의 모습이 제각기 다르듯 향기 또한 다르다. 같은 나무일지라도 수령에 따라 향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겐 향나무로 만든 윷이 있다. 이 윷으로 가족들끼리 모여 윷놀이를 한 적은 없지만 심심하면 꺼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문질러 보기도 하고 코로 가져가 향기를 맡아본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향나무 윷을 곁에 두고 아끼는 것은 이 윷을 보면 향나무의 일생을 생각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 향기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햇빛과 바람과 빗소리를 맡아본다. 어떤 생명체도 목숨을 거두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나무는 목리문(木理紋)으로 남아 삶을 아름다운 추상 언어로 보여
주면서 향기를 뿜어낸다. 나무 향기는 목리문(木理紋)에서 나는지 모른다.

 

 고가(古家)룰 찾았을 때나 사찰에서 무엇보다 나무의 마음과 향기를 느낀다. 목재에서 오는 숨결과 안정감, 그리고 친금감과 따뜻함은 나무를 지은 집만이 갖는 정서일 것이다. 인간은 한 그루 나무일지 모른다. 어린이를 새싹이라 한다든지, 큰 인물이 될 만한 사람을 '재목'이라 부르고 큰 인물을 '거목'이라 하는 것처럼 인간과 나무를 동일시하곤 한다.

 

 나무는 인간에게 삶과 인생을 알려주고 느끼게 하는 신호등과도 같다. 계절을 알려줄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이 의미와 감정을 불어 넣어 준다.

 나무는 인간에게 꿈과 향기를 주지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 지상에 나무가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꿈과 정서를 잃고 살아갈 의욕조차 잃게 될 것이다.

 

 나무에게는 생명과 꿈을 펼쳐 주는 신비의 몸짓이 있고 마음을 열어 주는 교감 언어가 있다. 나는 쇠붙이로 된 촛대보다 나무로 만든 거무튀튀한 촛대를 더 좋아하며 어떤 때는 목침을 베고 잠든다. 나무로 만든 것에는 나무의 일생이 아직도 나이테로 남아 있고 그 일생의 향기가 베어 나는 듯해서 나무의 푸른 일생을 한 순간 감지하며 내 삶에 맞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부신 햇살, 맑은 공기, 하늘의 구름은 나에게 진정 무엇이 되었으며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나도 나무처럼 숨을 거두고 나서도 짧은 인생을 목리문(木理紋)으로 남겨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나무가 그리운 세상이다. 나무 향기를 내는 벗을 갖고 싶다. 나무 향기로 남고 싶다.

 미지의 하늘을 향해 눈을 떠서 팔을 벌리는 신록속에서 나도 새싹의 움 하나를 피워 내고 싶다.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다시금 새로운 삶을 꿈꾸며 신록을 펼쳐 보고 싶다.

 

 신록 속에 있으면 내 몸에도 어느새 초록물이 오르고, 새들이 노래하며 찾아올 것만 같다. 이 천지 가득한 초록빛은 겨울 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던 나무들이 어
떻게 형형색색의 초록 빛깔을 내놓는 것일까.

 모두들 찬미, 축복, 찬탄, 황홀, 환희, 탄생 그리고 꿈빛의 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생명의 향유를 뿌리고 햇빛의 금싸라기를 뿌려놓은 것일까.새싹들도 뾰족뾰족 음표(音標)를 달고 나온 게 있는가 하면 눈웃음 치는 새싹, 종소리를 내는 듯한 새싹도 있다.

 

 아, 4월에서 5월까지 우리 나라 신록기의 산천은 어딜 가나 초록의 세상이다. 초록이 펼치는 시와 음악과 그림의 대잔치. 그 속에서 잠시나마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보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하늘이 가장 맑아 보이고 대지의 맥박이 들리고 삶과 생명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