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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투병 이청준씨 새 소설집 ‘그곳을 다시…’ 펴내

임창연 2007. 11. 28. 22:11
암 투병 이청준씨 새 소설집 ‘그곳을 다시…’ 펴내


“물레방아 돌아가듯 때 되면 작품을 내고, 내고…. 한 편쯤 더 쓰면 책 한 권 되겠다 하고 단편 ‘이상한 선물’을 쓰는데, 병원에서 호출을 받게 됩디다.”

안부를 묻자 이청준(68·사진) 씨는 “성깔 있는 놈을 만나서…”라며 웃음을 지었다. 몸에 다가온 폐암을 가리키는 얘기다. 다소 마른 모습이었지만, 변함없이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새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를 냈다. 2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1971년 첫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내고 (세상을 떠난) 평론가 김현과 술 한잔했던 때가 어제 일 같은데…. 석양녘 장보따리 싸는 심사다”고 소회를 밝혔다.

“나이로야 아쉬울 일 없지만 관리 제대로 못한 내 몸에 대해, 마음 쓰지 못한 내 이웃들에 대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이청준 문학전집’ 25권을 낼 만큼 왕성한 창작열에다 이후로도 네 권의 단행본이 더 쌓였지만, 누구에게도 헌사를 적어본 적이 없다는 그. 새 소설집의 서문에서 그는 ‘가슴 한구석으로 소리 없이 비켜 앉아 있던 여러 이름들’을 다정하게 부른다.

표제작을 비롯한 중편 3편, 짧은 소설 4편, 에세이 소설(에세이와 소설의 중간 단계) 4편이 묶였다. 식민지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조국을 ‘잊어야 했던’ 러시아동포 주인공이 2002년 월드컵 함성의 현장을 목도하곤 당혹스러워하는 장면(‘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서는, 이 씨 특유의 역사에 대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의 돛배’에서는 섬 밖으로 시집간 딸을 애타게 기다리는 친정 엄마의 설화가 서린 바위 배 이야기가 나온다. 지성적인 작가로 잘 알려진 그의 관심이 신화의 세계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소설이다. 어떤 향기가 나는 작품에서든지 ‘존재의 씻김’ 행위로서 소설 쓰기의 처절함을 만날 수 있다.

“백성에 대해 국가가 무엇인가, 그런 의식과 역사의 문제에 천착해 왔습니다만, 신화와 영혼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제 영혼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내 소설의 (더 가지 못할) 낭떠러지가 아닌가 싶고요.”

신화와 영혼의 세계는, ‘소설질’의 길에 40여 년 매진해 온 작가가 필연적으로 매혹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야기’의 세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오늘 일용할 건강을 주셨음을, 그리고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아직은 창작에 엄두가 안 난다고 정황을 전하면서도 작가는 “또 새로운 작품을 내서 이렇게 만나기를 바란다”며 열정을 드러내 보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