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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님의 연보와 문학세계

임창연 2007. 10. 10. 22:01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별그리고...그리움

 
시인 정호승은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부터 꾸준한 시 습작은 1968년
 경희대 국문과 문예장학생 입학으로 연결된다.
 그는 1972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시「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다음해인 1973년에 『대한일보』신춘문예에 시「첨성대」가 당선됨으로써
 시인으로 입문한다. 한편으로 1982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위령제」가 당선됨으로써 평소 그의 시에서 엿보이던 
서사에의 욕망을 성취하기도 한다.
정호승은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이후 
1999년 일곱 번째 시집『눈물 나면 기차를 타라』까지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으며 '민중의 한을 서정으로 감싸안는다'는
평가를 모으는 단단한 시편들은 
그를 1970년대의 중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정호승의 시는 무엇보다 잘 읽히는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이는 전통시가의 율격, 구어 혹은 민요체의 사용,
시적 소재를 일상의 친숙한 대상에서 구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또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꾸밈없는 위로의 목소리도 이에 한 몫 한다.
 그의 시편들은 한 경지에서 삶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꽉 엉겨붙어 있다. 그의 시를 읽음으로써 막연한 위로가 
아닌 구체적인 위로와 힘을 얻게 된다. 
사실 정호승은 소외된 주변인들으 고단하고 사연많은 삶을 
아궁이에 지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스한 기운을 시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다. 
고단한 삶을 마치 땔감처럼 지피는 그의 마음은
 제 사정의 그것처럼 간절하다. 
그는 결국 이 세상을 덥히는 땔감은 다름 아닌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는 주변인들, 
거대한 힘에 눌러 사는 소시민들의 애절한 삶임을 설파한다.
애절한 삶은 이 세상의 결핍을 드러내는 삶이며, 
기다림과 그리움의 삶이다.
 정호승은 서럽고 억울한 삶들이 기다리는 것과 
자신의 기다림을 섞어 버무리며 우리에게 삶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법을 가리켜 보인다.
 이는 그가 직접 얘기했던 
"나는 인간이 이루는 삶의 비극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내 시의 출발점이자 귀결점"
(시와 반시, 1999 가을호)이라는 데서
 다시금 확인된다.
시인의 대부분의 시는 다수를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지만 
너를 향한 개별적 사랑의 노래도 틈틈이 끼여든다. 
한편 그는 개인적 사랑의 간절함을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에너지화한다. 
이 때문에 간절한 슬픔의 사랑이 탄생한다. 
자연히 그가 대중의 슬픔을 대상화할 경우와 
자신의 슬픔을 대상화할 경우 그 감동의 편차는 없다. 
그들의 설움이 내 설움이 되고 내 설움이 
그들의 설움이 되는 한바탕 설움으 잔치를 완결해 가는 데서 
그의 시편들은 폭넓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별들이 따뜻하다>에서는 
민중의 한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부터는 
개인적 정서가 두드러진다는 편의상의 구획은 가능할 것이다.
 정호승의 주조음은 '간절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애끓는 나의 기다림과 우리의 기다림이 혼효되어 지향된다. 
결핍된 인생들이 처연한 눈빛으로 지향하는 사랑, 
끝내 오지 않는 사랑 때문에 그의 시에서 슬픔은 
일용할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 이렇기에 그의 시에서 반복되는 사랑,기다림,외로움,
 그리움, 슬픔, 눈물은 동일한 의미망 안에 있다.
2.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이 자신의 대표시로 즐겨 내세우는 
「슬픔이 기쁨에게」는 슬픔의 길을 향한 시인의
 출사표로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야겠다.
-「슬픔이 기쁨에게」전문
이 시의 핵심 구절은 "슬픔의 평등"이다. 
슬픔이라는 정서는 만인이 부둥켜안을 수 있는 계기를 베푸는 큰 힘이다. 
이것이 "슬픔의 힘"이다. 이 슬픔은 지금 부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슬픔"이다. 
따라서 '슬픔'은 '기쁨'에게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고 말한다. '
사랑의 소중함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나 사랑도 슬픔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이시는 암시한다.
이렇게 던져진 '슬픔'의 역설은 이후 정호승 시의 곳곳에서 
그 자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정호승 시의 처연한 목소리가 감동력을 더하는 것은 
전통 리듬의 차용한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생래적 어조가
 시인의 정조와 자연스럽게 만난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이 리듬 덕분에 지독한 슬픔도 노래가 되고, 
비극적 인물에게 의지력을 심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옥양목 옷보따리 보리밭에 내던지고 
보리밭에 숨어서 봄밤을 팔아
버선발로 뛰어오는 봄비를 팔아
치마끈 풀고 오는 봄바람을 팔아
누이는 눈 파이고 귀를 잘리고
군데군데 보리밭은 쓰러지고
빨가벗고 빨가벗고 보름달은 도망가고
소버짐 마른버짐 번지는 이땅
능골 논마지기 빚값에 팔아
송아지 핥아주던 어미소 팔아
상투깍고 통곡하던 할배도 팔아
꽁치 두마리 사들고 오던 애비도 팔아
누이는 소나무에 명주댕기 걸어놓고
벗으세요 벗으세요
군데군데 보리밭은 나뒹굴고 나뒹굴고
종다리 치솟는 아지랭이 팔아
호롱불에 하늘대는 젖가슴 팔아
호롱불은 넘어지고 보리밭은 타올라
활활 타올라 누이는 미쳐
실꾸리 반짇고리 보리밭에 내던지고
-「매춘」전문
시대의 노고한 삶이 처절하게 녹아 있다. 
화자는 누이의 매춘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말할 수 없는 비통한 것을 이토록 4.4조의 리듬과 
반복 어구를 통해 여유 있게 노래하는 것은 화자가 
시적 대상과 유지하는 거리에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특성은 위의 시를 비롯하여 정호승 시의 전반적 특징이다.
 정호승의 시들은 서러움의 정조에서 촉발되는 것이면서도 감상적이지 않다.
슬픔이 그냥 슬픔이 아니라 칼의 슬품이 되어야 하는 까닭에 
시인은 대상과 엉켜붙으면서도 대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거리를 확보한다.
 이 때문에 지독한 슬픔도 태연하게 대상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슬픔을 마다하지 않고 슬픔에 직면하여 
슬픔을 '칼'로 바꾸어 길을 떠나는 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쓰러진 짚단을 일으켜 세우고
평화시장에서 돌아온 저녁
솔가지를 꺾어 군불을 지피며
솔방울을 한 줌씩 집어던지면
아름다운 국화송이를 이루며 타오르는 사람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늘과 가까와져
이제는 새벽이슬이 내리는 사람
-「전태일」전문
한 시대의 거대한 부조리와 맞섰던 전태일의 죽음은 
마치 시지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삶의 부조리는 끝이 없을 것이지만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은 삶을 질을 바꾸어 놓는다. 부조리에 맞서는 것은
 비극적 조건에 맞서는 것이고 맞서는 힘과 칼이 곧 슬픔인 것이다.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구절은 
정호승 시의 곳곳에서 슬픔의 기능으로 자리하는 셈이다.
정호승이 대상화하는 처참한 삶은 대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공간위에 부려진다. 
그의 시에서 '서울'은 고통스러운 삶이 영위되는 
인간의 거소에 대한 제유다. 
비정한 삶이 영위되는 산업화 시대의 서울은
 신의 부재를 절감해야 하는 공간이다. 
「서울의 예수」는 이러한 추이를 감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서울에 나타난 메시아는 어떤 비전도 던져주지 못하고 탄식한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을 불행하고 
내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중에서
어떤 힘도 우리의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비관이 깊다. 
그러나 이 시는 예수의 통한어린 독백,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에서 보는대로
 이 시대를 치유할 연민의 힘을 환기키는데 그 초점이 있다. 
예수의 자책은 우리의 자책을 대변하는 속죄양의 그것이기도 하다. 
또한 서울에서의 예수의 역할은 시인의 역할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예수와 시인은 동일한 의미망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새벽의 사람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절벽 위에 길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와하는
아름다움의 길이.
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
절망의 물고기를 잡아 먹는 그는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
-「시인예수」전문
각 연의 마지막 두 행을 타자의 불행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자의 
면모가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다. 
1연에서의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2연에서의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사람의 바람", 
3연에서의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와하는/아름다움의 깊이",
 4연에서의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은 인간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온 
사람의 아들,예수의 진정한 모습이다.
「서울의 예수」에서의 예수는「시인예수」에 와서 
그 실상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진정성을 갈파하기 위해 길 위에 나선 메시아와 시인은 
이렇게 해서 등가관계에 놓인다. 결국 '시인예수'는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며 우리가 마침내 되어야 할 진정한 사람으로 자리한다.
3. 사랑과 따뜻한 목소리
이에 정호승이 슬픔의 예리한 가락을 끌고 돌진하는
 '사랑'의 뜨거움에 가 보기로 하자. 
슬픔의 사람들을 슬픔의 어조로 보듬어 간다는 데서 
이미 그의 사랑은 뜨겁다. 사랑의 부재에서 슬픔은 작동되고 슬프기 때문에 
사랑의 기다림이 절실한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그의 시편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드러나는 다수에 대한 사랑과 너에 대한 사랑이 
상승효과를 자아내 간절한 노래를 얻게 되는 계기를 엿보려 한다.
대략 네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에서부터 
서서히 개별적 정서로 발현되는'사랑'과 마주칠 수 있다.
나는 너의 시체다
5월의 푸른 강물 위로 떠오른
차디찬 너의 죽음이다
너와 나의 끝없는 사랑을 위하여
그 누군가가 강가로 끌어올린
꽃다운 너의 시체 위에 내리는 햇살이다
너는 나의 시체다
봄날의 강물 위로 말없이 떠오른
너는 나의 분노의 시체다
너와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죽음의 눈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눈부신 너의 주검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다.
-「사랑」전문
강렬하고 비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해부하고 있다. 
한편이 한편을 시체로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랑,
 사랑 중의 주체는 부풀고, 부푸는 만큼 대상을 자신의 실존 속에 
종속시키려 한다. 사랑을 목말라 하는 나는
 "눈부신 너의 주검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된다. 
"나는 너의 시체"가 되고 "너는 나의 시체"가 되는 
사랑은 그가 또 다른 시'어떤 사랑'에서 보여주는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고
 탄식하는 가혹하는 사랑이다.
이는 죠르부 바따이유가 '에로티즘'에서 말하는 
"결렬한 융합은 대부분 고통을 낳는다. 
서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그 고통"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차츰 서로가 서로에게 시체가 되는 사랑의 가혹한 열정을 물리치고
 사랑의 다른 모습을 고요히 보여 주기에 이른다.
떠나간 기차를 용서하라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
굳이 수색쯤 어디 아니더라도
그 어느 영원한 선로 밖에서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기차」전문
사랑의 상대를 배려하는 웅숭깊은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기차도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고 떠나간 기차,
 부재가 된 사랑을 조용히 관망한다. 
결국 "영원한 선로"인 사랑을 수긍하며 
"서로 포기"하는 사랑의 방법을 떠올린다. 
여기서 "포기'는 이해의 다른 말일 것이다. 
이 시의 문법 안에서 서로 포기한다는 것은 
서로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사랑의 이해인 것이다. 
이러한 사랑에 조용한 성찰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 이르러 
한껏 빛을 발한다. 
사랑의 지순한 속성 쪽으로 시인의 정서가 한 껏 기울어 있는 것이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키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자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리기다소나무」전문
이 시에 투영된 사랑은 말한 바와 같이 지순한 마음의 지향을 드러낸다. 
정호승이 즐겨 아름답운 이미지로 차용하는 나무를 
비유어로 삼아 사랑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다른 존재자를 맞아 
비로소 존재 가치를 회복하는 절차를 보여준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는 모두 만남의 첫 순간을 예리하게 쪼갠 단면들이다.
그만큼 첫 순간에 의미가 집중되어 있다.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완성하려는 화자의 의지이며 이 의지는 당신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며 결국
 "사랑하는 겅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는다. 
시인의 개별적 사랑과 다수를 향한 사랑이 함께 
어우려져 '사랑'은 그 완성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편들은 사랑의 어쩔 수없는 속성인 외로움을 
또한 아름답게 꽃피워 준다. 외로움은 사랑이 시작되는 동인이기에, 
사랑의 숙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라는
 자신과 타인을 토닥이는 꾸임없는 사랑의 목소리를 체득한다.
이 목소리는 이웃을 향한 대승적 사랑과 
너에게의 열정을 섞어 만든 따뜻한 목소리다. 
독자들은 이 느꺼운 목소리에 많은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리라.
4. 맺음말
이상 정호승의 그간 시편들을 통하여 처절한 
슬픔의 칼날이 사랑을 향하여 작동되어 가는 추이를 간단히 살펴본 셈이다. 
시대의 곤궁함과 곤궁함을 더욱 힘겹게 짊어진 이웃들과 
개인적 정서로 발현되는 사랑의 고통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슬픔의 진정한 힘이 뽑아 올린 사랑의 지순성에 이르기까지를
 다소 거칠게 밝혀 보았다. 이는 그의 많은 시편들을 오가며 본 
하나의 길에 불과함을 밝힌다.
내용출처 : [기타] 도서 : 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  
 
그는 분명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고 효용론자였다 
[글 : 김영탁 <시인>] 3호선 대청역과 지하로 연결된 
나산 오피스텔은 덩치만 큰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었다. 
그는 여기에 개인 작업실을 두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1438호.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적당한 중키의 정호승 시인이 
따뜻한 웃음으로 방문객을 맞이해 준다. 
커피향이 좋다. 작업실은 작은 방이지만 정갈했다. 
창문 쪽으로는 시야가 탁트이고 책상은 창가에 위치하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독하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창문으로 이루어졌고 
창문을 통해서 봐야하고 그렇다면 
고독한 사람들 뿐인 것이다. 
시인 정호승의 작업실은 
시인 자신만의 방이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일 것 같은 
고독이 자연스러운 듯했다. 
그래서 필자는 고독한 외로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김요섭 선생님이 
세상을 뜨셨는데 평소에 선생님께서 
'시인은 고독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고독을 견뎌한 한다'는 말씀이 제 가슴에 닿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라고 말하며 
명랑하게 웃는다. 따뜻한 허무주의자 같다고 말하자 
종래엔 모든 것이 허무하지만 삶은 가치있고 
그중엔 사랑하는 것이 아니, 
사랑이 없어서는 살 수 없고 사랑해야 
어떠한 궁극 (이 부분은 조금 추상적이지만 
시인의 화법(話法)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정호승은 정확하게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데뷔했다. 
경희대 시절 문단에 데뷔해야 장학금이 지급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장학금을 노리고 시를 열심히 쓴 것이었다. 
그는 그 이후에도 현대시학과 신춘문예 
(1973.대한일보)에 시가 당선되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도 당선된다. 당선복이 많다고 한다. 
(시를 잘 썼다기보다 운이 따라준 거라는 겸손의 말) 
70년대 시인으로서 바로 위의 세대인 60년대 
시인들의 난해한 모더니즘과는 변별성이 있었다고 한다. 
70년대는 전태일과 유신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시인 자신의 시대, 
즉 90년대 시인이며 그렇게 되도록 살며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난해한 시보다 
쉬운 시가 좋을 뿐, 시는.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다양성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 예로 지나간 작품에서 
의고체를 빈번하게 진술한 것은 시의 품격 때문인데 
지금은 진부성도 있고 해서 가급적 안 쓰려고 한단다. 
이렇게 조금씩 시의 경향이 변화되는 것도 
그가 강조하는 바대로 시가 시대에 민감한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효용적 가치'는 70년대와 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는 시집(<슬픔이 기쁨에게. 1979>, 
<서울의 예수. 1982>,<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들이 말해 준다. 
그때를 생각하며 그는 분명 예술지상주의자는 
아니고 효용론자였다고 한다. 시집<서울의 예수>가 
나오고 나서 젊은 신학자가 한국기독교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정호승의 시 <서울의 예수>를 인용했다. 
거기서 좀더 나아가 <서울예수(소유격 '의'가 빠진)>란 
영화도 제작에 들어갔다. 묘하게도 필자는 
광화문 육교에서 <서울 예수> 영화촬영 장면을 봤다. 
그때가 80년 초반인데 연도는 확실치 않지만 
예수로 분장한 배우가 상의를 벗고 어린 거지를 
안고 있는 장면이었다. 무슨 곡절인지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다. 
 
정호승에게 영향을 준 
시인은 다형(茶兄) 김현승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서정주. 김수영. 
정현종. 황동규. 신경림 등이다. 노자와 장자는 가슴에 
와 닿아서 좋고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성서는 통독한 적이 없어도 언젠가 완독하고 싶은 책으로, 
시인에게 숙제로 남아있다. 
그이 가계는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이지만 신앙 면에선 솔직히 약하다고 한다. 
신앙과 다른 면에서 인간의 영역밖에 존재해 있는 
신의 영역을 그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싱크대 서랍 속에서 흙묻은 조그만 고구마를 
하나 달랑 들고 와서 필자에게 쑥 내민다. 
"서랍 속에 넣어두고 한참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열어 보니 싹이 돋았는데 너무나 신기합니다.
" 그러면서 어린애처럼 웃으며 "깎아줄까요? 
맛있는데."라고 말한다. 
그는 고구마를 즐겨 먹지는 않으나 좋아하는 듯했다. 
아마 서랍 속에 넣어두고 어려웠던 시절이 생각하면 
고구마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고구마를 별미로 먹지 않고 
주식으로 먹어보았던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아무튼 그의 시적 정서의 토대는 도시 변두리다.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변두리를 전전하는 
신산스러운 가족사가 있다. 그의 시에 자주 출몰하는 
똥, 모래, 칼등은 육화된 현실의 장치들이다. 똥; 
그는 똥에 대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새의 똥은 얼마나 아름답고, 
똥이 없으면 어떻게 생명이 순환이 있느냐고, 
똥에 대한 의미론자가 되었다. 
 
이제 세간의 관심과 
시기 그리고 시집이 좀 팔려서 약간의 돈이 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대하여 고백을 좀 하라고 했다. 
"저는 기독교적 문화와 정신의 토대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시와 삶의 정서를 관류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시의 상상력은 무한한 우주와 
세계 속에 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의 질료는 풍부할 뿐만 아니라 
시적 차용은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불교와 선(禪)의 이미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제목도 불가의 화도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저와 생래적인 친숙함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제 자신에게 와서 다시 시화(詩畵)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대학 교수 한 분께서 모 신문 칼럼에, 
저의 시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르지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고 
다소 원색적인 글을 올렸습니다. 
오로지 제목 하나만 갖고. 그리고 그 유명한 
현대문학의 <죽비소리>에서도 한 대 맞았죠. 
그 이후에 <죽비소리> 필진들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들 중에 한 분이 맛이 어떠냐고 묻길래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시에 대해서 
누가 무어라 해도 상관치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는 담담하면서도 약간 상기된 것 같았다. 
그는 말한다. "사실 어는 큰스님의 이야기인데 
- 사랑해라 이놈들아. 너희는 아직도 
사랑하나 제대로 못하나. 이 병신! 사랑하다 죽어라. 
- 충격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말을 너무 많이 
쓰니까 바랜 느낌이 있지만 저는 지금도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가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부분을 
다소 상업적으로 생각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 이쯤에서 그는 강아지의 눈을 바라보면서 
뭔가 느낌이 온다고 한다. 천진무구한 본능이 
슬프게 살아 있는 강아지의 눈동자. 
아끼고 토닥거려 줄 때, 강아지 역시 느낌을 알고 
몸짓할 때, 왈칵 밀려오는 애틋함. 그러한 것들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물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오죽하겠습니까. 
서로 다른 언어코드가 충돌해도 수용의 폭을 넓힐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트인다고 생각합니다. 
시도 시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허구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진실은 문학의 바탕이고 
그것은 감동과 연결되어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필자에게 묻는다. 필자는 시론(時論)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겸연쩍어 하며 평생동안 시를 쓰면서 
간단명료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도 문학의 한 장르일 뿐, 시인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인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테고 시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방법일 것이라고 한다. 
정호승은 아직 마음에 있는 시를 못 쓴 것이 많다. 
박정만 시인이 작고할 때 소설가 이윤기씨와 같이 
그는 관(棺)머리를 들었다. "왜 이렇게 무겁노. 
이 인간은 아직도 시가 머리 속에 꽉 찼나."라는 
이윤기 선생의 말을 듣고 그는 써야 할 시를 쓰고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열심히 쓰고 싶다고 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전통의 뿌리가 약하다고 한다. 
그는 고전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공부가 튼실하다. 
군대시절 서정주 시선집을 베껴서 보았는데 
노트가 너덜너덜해서 글씨가 지워질 정도였다. 
모던함도 전통에 뿌리하고 있을 때 살아 있으며, 
한 예로 개량 한복도 전통 한복에 기초하지 않을 땐 
기형적일 수밖에 없을 거라며 어쨌든 시도 
전통의 맥과 뿌리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나 너무 전통에 경도되는 것도 
정신과 감각이 노화(老化)할 수 있으니까 
적절한 중도(中道)가 필요하다고 한다. 
시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시인이 주는 애정 어린 
한마디는 등단에 연연하지 말고 독서와 체험, 
그리고 오랜 시간의 바탕이 중요하니까 차분한 
자기 공부가 제일이라고 한다. 
따뜻한 커피와 향이 좋은 사과의 과육, 달콤한 감을 베어먹었다. 
유쾌한 허무주의자와 헤어질 시간이 됐다. 
전동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뭔가 잊어버리고 온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아! 그것은 처음부터 애를 먹이던 녹음기, 
결국 작동이 안되어서 인터뷰를 육필로 했지만 
녹음기에 연결시키는 이어폰이었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 사랑한다고 쓰고 물을 마신다 /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 비가 그친 뒤 
/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 강물을 내려다본다 
/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 사랑한다 
/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정호승의 시 사랑한다-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남은 발자국들끼리 /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 남은 발자국들끼리 / 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 
// 녹아버리는 것을 보면 /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정호승의 시 발자국- *'시인학교'중 발췌하였습니다